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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人&스토리] 대구MBC '달구벌 만평' 원로 연극인 홍문종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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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00:05:01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시사만평 사이다 진행 35년, 지역 대표 연극인으로 50년
 
원로 연극인 홍문종 씨.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달구벌 만~평!”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아침, 누군가에게는 속 시원한 아침을 여는 소리다.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다정하면서도 꼬장꼬장한 ‘할배’ 목소리로 출근길 애청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이는 원로 연극인 홍문종 씨다. 대구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목소리, 특유의 톤에 익숙해진 청취자라도 그가 출연작이 200편을 훌쩍 넘는 원로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달구벌 만평과 함께한 35년, 연극인으로 살아온 50년간 그의 눈에 비친 대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것

대명동 골목에서 배우 홍문종의 이름은 ‘선생님’이다. 연극계 대선배가 된 그가 처음부터 연극 무대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전사했다. 가세가 기울며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건장한 체격 덕에 운동특기생(투척)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종목을 유도로 바꾸고서는 승승장구했다. 1969년 열린 제50회 전국체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받을 정도로.

"연습 도중 왼쪽 광대뼈를 다쳤어요. 인생의 전환점이었죠."

상대 선수의 낙법 실수로 왼쪽 광대뼈가 함몰됐다. 굳어버린 뼈는 그의 인상을 바꿨다. 인생도 바꿨다.

어릴 적 그는 가수나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운동 중 산에 올라 고함을 질러가며 발성 연습을 했던 것도 그 꿈을 이루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비대칭 얼굴은 화면에 맞지 않았다. 자신감을 잃었다.

대명동을 배회하다 우연히 알게 된 '무지개'의 희곡 작가 고(故) 이만택 선생이 잘 아는 연극인을 소개해준다고 했다. 대구에 처음으로 연극을 소개한 극단 '공간'의 대표 고(故) 아성 이필동 선생이었다.

1969년. 카메라를 놓친 대신 무대를 얻었다. '공간'의 연구단원이 된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했다. 발음 교정을 위해 볼펜 한 자루를 늘 입에 물고 다녔다. 의자에 배를 짓누르고 엎드리면 발성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배 위에 다듬잇돌을 올리고 누운 채로 힘을 줘 소리를 내면 복식호흡에 좋다나. 건물 옥상이든, 가로등 밑이든 연습은 계속됐다.

손에 쥐는 돈은 없었다. 극단이 동호인제로 운영된 탓에 연극이 흥하면 몇 푼을 받지만, 망하면 외상값이 될 뿐이었다. 1970년대에는 '소금단지'가 유일한 조명조절 장치였다. 소금물이 든 통에 전선을 담가 밝기를 조절했던 시절, 제작비 수입은 조명기사에게 제일 먼저 주어졌다. 2막이 올랐는데 조명기사가 '파업'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3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 몰리에르 작, 아성 연출의 '수전노'(1972)에서 '메뜨르 시몽'이라는 중개인 역을 맡았다. 첫 작품은 그렇게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 '공연법'이 개정됐다. 1980년대 들어 우후죽순 생긴 극단이 대구에서만 20곳 이상이었다. 누구나 극단을 차릴 순 있었지만, 연기자가 태부족이었다. 극단 여럿이 합작해 막을 올리는데만 치중하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졌다. 관객은 외면했다.

◆헤헤~어지간히도 해 처먹었네!

라디오 시사만평이 전성시대였던 때가 있었다. '오발탄'(MBC), '자갈치 아줌마'(부산MBC) 등은 정권 저격수 역할을 하며 청취자의 답답한 속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가십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정부의 견제가 심해졌다. 제3공화국 시절, 눈엣가시 같은 일부 프로그램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달구벌 만평'(1967)은 아이러니하게 살아남았다. 홍 씨는 "1960년대 말 수성관광호텔에 투숙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연히 김경호의 '달구벌 만평'을 듣고 '재밌네. 이런 것도 있어야 잘할 것 아니겠나'라며 칭찬해 이 프로그램이 살아남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고 했다.

1984년 10월, 가끔 김경호의 대타로 녹음실을 찾았던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김경호를 사칭한 사건들이 생기면서였다. 중앙정보부도 벌벌 떨게 한 '달구벌 만평'이라니. 출연료, 방송시간, 가릴 게 없었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우선 김경호의 어투를 따라했다. 흉내를 곧잘 냈던지 구분을 못 하는 청취자도 많았다. 제 색깔을 찾는 데는 1년이 더 걸렸다.

방송 녹음은 전날 오후에 이뤄진다. 하루 이틀 미리 녹음을 하면 어떨까 싶지만 미제사건이 갑자기 해결되거나, 뜻하지 않게 사고가 생기면 보나 마나 재녹음이다. 비상대기. 35년간 외국 여행이라고는 주말에 다녀온 일본이 전부다.

녹음은 대본에서 시작한다. 기자들의 취재 아이템 중 본방송에 나가기엔 약하고, 버리기엔 아까운 내용을 선별해 세 가지 내용으로 짜인 콘티다. 취재된 내용을 전달할 뿐인데 아직도 홍 씨가 취재해서 대본을 만드는 줄 아는 청취자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신비감을 가진 분들이 계신데 솔직히 말씀드려 죄송해요. 그러나 뉴스보도 형태로 된 대본에 감정을 싣는 건 제 권한이랍니다."

나머지는 그의 몫이다. 처음 마이크를 넘겨받았을 때부터 습관이 생겼다. 새로 부임한 기관장의 목소리를 분석하고 외우는 것. 일명 '높은 사람'의 '목'을 날리는 촌철살인으로 유명하기에 더욱 조심한다. 더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은 그의 입에서 나온다. 야비하고 치사한 술수를 쓴 기관장의 목소리는 더욱 얇고 간사해진다.

'달구벌 만평'에는 톤이 있다. 그는 문장을 마치며 "~데요"라고 한다. 종종 "헤헤" "허허" "허~"라며 추임새나 감탄사를 넣을 때도 있다. 한동안은 연극 무대에서도 만평 톤으로 대사를 처리해 지적받는 일이 잦았다. 요즘은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만평조의 목소리가 습관적으로 나와 놀림을 받기도 한다. 그만큼 빠져들었다는 얘기다.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름은 남자였는데, 당사자가 여성이었던 것. 남자 목소리로 방송을 내보내고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그날 이후 대본에는 등장인물의 지역, 연령, 성별이 표기됐다.

시간이 흘러 메아리는 잦아들었고, 목소리에 선 날도 무뎌졌다. 가끔 취재기자와 데스크에 "너무 재미없어"라고 대본 교체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제6공화국 이후로는 약해졌어요. 빠르게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에서 기관장의 처신도 빨라진 거죠. 교통방송으로 돌아선 청취자도 많고요. 이가 무뎌진 탓이 아닐까요. 두루뭉술 넘어가기보다 파헤쳐서 시원하게 긁어버리고 싶어요. 예전처럼."

◆흐릿해질수록 소중한 무대

그는 프리랜서다. 1982년 연극협회 대구지회장을 맡으면서 친정 격이던 '공간'에서 나왔다. 불러주는 곳에는 어디든 갔고, 매년 3, 4개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들의 세상'(1975), '대머리 여가수'(1977), '맹 진사댁 경사'(1989), '뜨거운 땅'(1995), '한 여름밤의 꿈'(1996)….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작품은 빛바랜 기억으로 남았다. 50년이 지나도록 목소리도, 열정도 그대로였지만 그가 200개를 훨씬 넘는 출연작 중 몇 가지 작품을 기억하는 데에는 하루가 걸렸다.

이제 단체관람 학생이 채웠던 객석은 회식을 대신하는 직장인들로 채워졌다. 소금단지 자리는 쿼츠 조명이 자리 잡았고, 쓰러졌던 지역 극단은 알차게 만든 창작극을 선보이며 외면했던 관객이 돌아왔다. 대명공연문화거리에도 활력이 생겼다.

원로가 된다는 건 두렵다. 또 외롭다. 같은 연배에서 활동하는 연극인은 대구에선 서영우, 경북에선 김삼일 정도가 전부다. 극단 사무실에 들르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쌤, 오셨습니까?"하고 반기지만, 담배 한 개비 피우러 나갔다 오면 아무도 없다. 이제 눈치가 보인다.

"선배가 된 게 무서워요."

요즘은 연극계에 발을 들이는 연예인 지망생이 늘었다. 돈보다는 연극을 사랑하고, 무대에 오르려는 열정은 비슷하지만, 근성이 부족한 후배들을 보면 잔소리가 나온다. 터줏대감 노릇을 했던 '달구벌 만평' 진행자리도 누군가에게 넘겨줘야 할 때지만 적당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무수한 노력으로 연기를 모방하고, 자신의 색깔을 덧입혀야 하는데 포기가 빨라요."

그래도 할 말은 잊지 않는다. 연극인이 모이는 자리에서 "몸 챙겨서 대구경북지역 연극인으로서 자부심을 잃지 마라" "관객에게 어필할 힘을 길러라" "대본을 하루라도, 한 줄이라도 더 봐야 도태되지 않는다" 등. 노파심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배우는 이제 밀가루로 쑨 풀을 전봇대에 발라가며 포스터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대사를 잊어도 능숙하게 대처한다. 실수로 장면을 뛰어넘었다가 되돌아가도 어색하지 않게 처리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늦깎이 졸업장도 땄다. 더 넓은 곳에 가지 못해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왕부터 거지까지 모든 걸 경험했어요. 반은 이룬 거죠. 지역에서 이 정도로 환영받아 행복합니다."

이지현 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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